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민족화해 2018 03+04 63
사진에는 여름인 듯한 계절의 한낮에 “세 여자가 식민지 조선 공산주의 운동을 감내한
개울에 발 담그고 노닥거리고 있”는 모습이 찍혀 있 세 여전사의 파란만장
다. “팽팽한 종아리와 통통한 뺨, 가뿐한 단발은 세 여
자의 인생도 막 한낮의 태양 아래를 지나고 있음”을 붉은 사상과의 자유연애, 조선의 콜론타이
보여주는, 청계천에서의 여유로운 물놀이 풍경은 세 - 허정숙
여성의 재기발랄한 청춘의 현장을 대변해준다.
이 작품에서 가장 오래 자신의 흔적을 한반도에 새
이렇듯 주세죽(1901~1953), 허정숙(1902~1991), 긴 존재는 허정숙이다. 1902년 경성에서 출생하여
고명자(1904~1950)는 1920년대 ‘정치에너지 대폭 1991년 평양에서 사망한 허정숙은 공산주의적 신념
발의 시대’에 공산주의 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으면서 을 실천하면서 남과 북, 일본과 중국, 미국 등을 돌아
언론으로부터 ‘트로이카’로 명명된다. 이 세 여성들과 다니는 등 20세기를 관통하면서 온갖 간난신고 끝에
함께 1900년생 동갑내기로 청년 공산주의 운동을 이 북한 체제 성립과 안착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여성
끌던 ‘주세죽의 남편 박헌영, 허정숙의 남편 임원근, 이기 때문이다. 허정숙의 이야기는 1920년 19세 상
고명자의 애인 김단야’ 등의 세 남성 역시 ‘또 다른 트 해행부터 기록되어 70여 년에 이르는 장대한 일대기
로이카’로 불린다. 1920년대 초중반에 맺어진 세 여 가 서사화된다.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
자와 세 남자의 끈끈한 연대는 ‘우정과 애정과 이념’ (105인 사건)이 터지면서, 정숙은 임원근, 박헌영, 주
이 버무려져 이후 공고해진 관계를 구축한다. 세죽과 함께 체포되고, 단야는 조선을 탈출한다. 이
때부터 해방과 분단 전쟁기에 이르는 25년 동안은 세
하지만 1925년 11월 제1차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여성 모두에게 시련과 좌절, 희망과 절망이 이어진다.
구속과 도피가 이어지면서 이들의 운명은 식민지 조 정숙은 ‘조선의 콜론타이’라는 별명이 붙은 채 첫 남
선의 숙명적 부침에 따라 달라진다. 그리고 그 비극적 편 임원근과의 결혼과 이혼, 송봉우와의 연애와 이별
여정이 20세기 한반도의 역사적 굴레의 하나였음이 등을 거치며 ‘혁명유휴분자’, ‘부르주아 전향자’라고
드러난다. 비판받지만, 새로이 최창익을 만나면서 함께 남경으
로 가서 항일 무장투쟁에 참가한다.
지난 2007년 8월 15일 주러 모스크바 대사관에서 열린 제62주년 광복절
기념식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인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에게 건국훈장이 1945년 해방 이후 평양에 입성한 정숙은 선전부
수여됐다. 이날 훈장은 고인이 된 주세죽을 대신해 그의 딸 비비안나 박이 일을 맡으면서, 박헌영과 연안파와 소련파를 분할통
받았다. ⓒ연합 치하는 35세의 김일성에게 찬탄한다. 1949년에는 최
고검찰소 부소장 채규형과 로맨스를 불태우지만, 소
련파였던 그는 한국전쟁 중 열린 군사재판에서 사형
판결 직후 총살된다. 이후 정숙은 1952년과 1956년