Page 68 - 민족화해 94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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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, <손님>의 경우 <황해도 진 떻게 부서질 수 있는지를 문제시하는 것은 황석영과
지노귀굿>, <심청, 연꽃의 길>은 심청전, 마지막으로 같은 타고난 이야기꾼에게는 필연적인 선택일 수밖
<바리데기>는 죽은 이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굿인 <황 에 없었을 것이다. 어쩌면 그에게 있어 주인공 바리는
천무가> 중 무속신의 원조 중 하나인 바리데기의 신 급변하는 세계와 결코 유리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
화를 모티브로 한다. 과거의 상징으로 전지구화 된 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. 그만큼 전지구화된 세계에
재를 담아낸다는 것은 그만큼 ‘민족’으로 ‘세계’를 상 서 소외되어 배제된 난민은 특정한 이들에게만 국한
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. 작가는 한반도의 맥락에서 된 것이 아닌, 자본주의의 광폭함과 국민국가의 폭력
가장 민족적인 주제 예컨대 한국전쟁 당시 학살, 조선 에 노출되어 있는 모두의 모습이니까 말이다.
여성이 경험하는 가부장제와 제국, 마지막으로 북한 그럼에도 작가가 굳이 북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
여성으로서의 이주 경험 등을 전통적인 서사양식과 세운 이유는 현재의 한반도에서 가장 난민적 삶에 노
상징 등에 버무려 전지구적 현상으로 서사화하는 것 출된 대표적 주체이기 때문이다. 대부분의 탈북 여성
에 집중한다. 민족 신화의 원형으로 민족 너머의 세상 은 때로는 경제적 이유에서 혹은 가족의 해체를 경험
을 그려냄으로써 민족적인 것이야 말로 바로 작금의 하게 되면서 국경을 넘어 힘겹게 생을 연명하게 된다.
탈민족적 세계의 일부라는 주장을 담아낸다. 조금 더 이들이 중국이 아닌 남한으로의 이주를 선택하는 가
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민족문학으로 세계문학의 중심 장 큰 이유는 바로 남한이 법적 시민권을 얻을 수 있
에 서고자 했던 작가의 큰 포부가 그대로 담긴 작품이 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인데, 이는 국가의 테두리에 속
바로 위의 세 편의 작품이다. 하지 않은 북한 여성들이 중국에서 어떤 상황에 놓이
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포부를 지닌 황석영이 주목 는 지를 간접적으로 증언한다. 한나 아렌트는 세계인
한 주체가 바로 북한 사람, 그것도 북한 출신 ‘여성’이 권선언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, 선언문에서의 ‘인권’
라는 점이다. 이 소설이 출간된 2007년 즈음이 탈북 의 대상은 바로 시민권을 지닌 이들에 국한된 것임을
여성의 난민적 삶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한층 고조되 적실하게 비판한 바 있다. 그만큼 시민권이 없이 떠
었다는 점과 오랫동안 분단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돌아다니는 난민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는커녕
작가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당연한 것일 수 있다. 다 생물학적 생존까지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.
만 황석영의 소설은 단순히 탈북 여성의 삶을 소재로 하지만 시민권을 찾아 남한으로 이주한 북한 출신
한 것에서 머물지 않고, 그들의 경험을 세계적 맥락에 자들은 법적인 권리는 얻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분
서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. 상당수의 탈 단체제와 민족국가라는 틀에서의 한계를 오롯이 경
북여성을 다룬 소설이 그들의 중국에서의 삶에 주목 험하게 된다. 이들은 문화적 차별과 분단 폭력에 노
하거나 남한에서의 정착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<바리 출되어 남한에 살면서도 숨죽이며 살아간다. 이에
데기>에서의 탈북 여성 바리는 유럽이라는 전혀 다른 최근 탈북자 중 몇몇은 시민권을 준 남한을 떠나 스
공간으로 이주하여 작금의 세계의 주요 사건들을 몸 스로 난민의 삶을 선택함으로써 민족국가에 얽매이
소 경험하는 주체로 그려지기 때문이다. 미국 중심의 지 않는 전복적인 삶을 실천하기도 한다. 자신을 보
패권에 생채기를 냈던 9·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과 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국가가 사실은 허울에 불
파키스탄 등에서의 연이은 보복성 분쟁, 이후 계속되 과한 존재라는 것을 파악한 이들이 그들만의 대안적
는 테러 속에서 국가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다. 남한을 떠나 스스로 난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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